[중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숙자가 천사를 만났다'
1. 12월 25일, 세상은 밤새 내린 눈으로 인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어있었다. 오전 7시밖에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한동수 사장 집 앞에는 신문사와 방송국 등에서 온 기자 수십 명이 모여 진을 치고 있었다. "한동수 사장한테 자식이 있다는 게 사실이야?" "며칠 전에 미국에서 귀국한 딸이 친자확인소송을 신청했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앞면 있는 기자 몇이 모여 추운 날씨에 손발을 구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세운 회사의 수익 대부분을 소외된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기부해온 한동수 사장은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유명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미국에서 온 한 중년여성이 친자확인소송을 신청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 때였다. 대문이 열리더니 한동수 사장이 운전기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고, 모여있던 기자들은 우르르 한 사장 앞으로 몰려가 저마다 품고 있던 질문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 사장님, 정말 자식이 있습니까?" "그동안 따님이 있다는 걸 왜 숨기셨습니까?" "저희가 알기에는 딸이 한 명 있었지만 사장님이 사십 대 중반이셨던 20년 전에 이미 죽은 걸로 아는데 그동안 거짓말을 하신 건가요?" "무슨 말 못할 숨겨진 로맨스라도 있으신 건 아닌가요?" 무너진 둑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기자들의 질문이 넘쳐났지만 한 사장은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운전기사는 몰려든 기자들을 밀어내며 한 사장이 차에 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 사장이 차에 탄 후에도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해서 쏟아졌다. "사장님, 한 말씀한 해주세요?" "소송에는 응하실 건가요?" 하지만, 한 사장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 출발할까요?" 운전기사가 말했다. "그래요, 김 기사. 이러다 늦으면 우리 딸이 화낼지도 몰라요." "네, 사장님!" 운전기사는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이윽고, 기자들 사이로 한 사장이 탄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취재거리가 사라지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허탈한 모습으로 장비를 챙기며 저마다 떠날 준비를 했다. 방송국 카메라 장비를 챙기던 한 젊은 남자가 자신의 선배에게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선배님, 한동수 사장님이 예전에 노숙자였다면서요?" "그랬지. 그게 지금으로부터 한 이십 년 전이였을 거야……" 2. 서울역 앞에는 1991년이 이제 겨우 35일 남았다는 전광판이 번쩍이고 있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하루 종일 내린 폭설 탓인지 거리에는 쌓인 눈과 가로등 불빛만 마주보고 있을 뿐 인적도 차량도 보기 힘들었다. 동수는 자라처럼 자신의 목을 옷 안으로 구겨 넣은 채 마치, 얼굴을 때리는 듯한 칼바람을 피해 뒤로 걸어가고 있었다. 혹 넘어질까 두려워 다리에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걷던 그의 시야에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발걸음을 멈춘 동수가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자 백 원짜리 동전 한 개가 손에 잡혔다. 장갑이 없어 발갛게 얼어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동전을 바라보던 그는 마치, 그 동전 하나에 자신의 운명이 걸린 듯 차디찬 공기를 가르는 뿌연 입김과 함께 '제발……'이란 단어를 토해냈다. 전화기에 동전을 넣은 동수는 입김으로 얼었던 손가락을 녹이고는 번호 하나, 하 나를 조심스럽게 누르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아직 한 달이나 남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벨 소리는 캐럴 송 '울면 안돼'이었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서언 물을 안 주신데~' 경쾌한 리듬의 캐럴 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동수엔 전혀 경쾌하지 않았다. 이윽고 노래가 멈추면서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동수는 왼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를 급히 오른손으로 바꿔 들며 말했다. "창수니? 나야, 동수! 잘 있었어?" "그, 그래…… 근데, 한동수 네가 웬일이냐?" "창수 네가 오늘 전화하라고 했잖아? 오늘쯤이면 돈 줄 수 있다고, 기억 안나?" 동수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참, 내가 그랬었지……" 하지만, 창수는 기억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창수는 동수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였다. 2년 전 동수의 퇴직금 중 1억을 자신의 사업자금으로 3개월만 쓰겠다며 빌려간 창수는 이자는 커녕 원금도 안 갚고 있었다. "야, 동수야. 너도 알다시피 사업하는 사람들은 연말에 결제할 게 많잖니? 이번 엔 꼭 줄려고 했는데 사정이 좀 그렇다. 이해하지?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창수의 말을 듣던 동수는 어깨가 축 늘어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꽁꽁 언 땅이 꺼질 정도의 무거운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동수야 한두 달 후에 다시 전화해라. 그 때는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알았지?" "그, 그래. 그럴게……"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던 동수는 전화기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혹, 창수가 자신을 부르는지 알고 급하게 수화기를 귓가로 가져갔다. 그러자 수화기에선 전화가 끊어진 줄 안 창수의 호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 마담, 밴드 불러. 오늘 밤 아주 신나게 놀아보자고!' 동수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왔다. 전보다 더 세찬 바람이 불었다. 그는 또다시 목을 옷 안으로 구겨 넣고 바람을 등진 채 뒷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두 걸음 걸었을까? 그의 머릿속에 조금 전 들었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울면 안 된다는 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그의 눈은 촉촉해졌다. '45년이란 세월 동안 남보다 더 착하게 살았는데 나한테 선물은 못 줄망정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인 걸까?' 그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길게 내 뱉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동수는 생각했다. '45년이란 세월 동안 남보다 더 착하게 살았는데 나한테 선물은 못 줄망정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인 걸까?' 그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길게 내 뱉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자 저녁 한 때 멈췄던 눈 발이 가로등 불빛 조명을 받으며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3. 인적이 끊긴 지하도 내에는 노숙자들이 모여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차디찬 바닥에 신문이나 빈 박스를 깔고 누워 마치, 등이 휜 새우처럼 자는 이도 있었고, 몇몇은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동수가 주위 눈치를 보며 바닥에 앉으려 하자 소주를 마시던 무리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말했다. "어이, 한 씨! 이리와 한 잔해?" 동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손을 흔들며 "전, 괜찮습니다. 많이 드세요."하고는 자리에 앉아 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수 등 뒤로 이미 얼큰하게 취한듯한 노숙자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행님 요, 점 마는 먹물이다 아 인교? 점 마 대가빡엔 문어마냥 먹물이 꽉 차 있어가꼬 우리처럼 가방 줄 짧은 노가다들 하고는 안 놈니다!" 노숙자 세계에도 서열이 있었다. 노숙생활을 오래 하고 힘센 사람은 지하도 안 쪽에 자리를 잡고, 동수 같은 신참 은 지하도 입구 쪽 즉, 바람이 잘 들어오는 추운 곳에서 자야 했다. 여느 노숙자들처럼 박스를 깔고 가방에서 침낭을 꺼내 덮고 누운 동수의 모습은 마치, 등이 휜 자라의 모습 같았다. 동수는 낡고 더러운 점퍼 안 주머니에서 딸 소연이의 사진을 꺼냈다. 긴 생머리에 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살며시 웃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자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죽더라도 우리 소연이는 한 번 보고 죽어야 하는데……' 하지만, 노숙자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 때문에 딸에게 찾아갈 수 없었다. 얼마나 잤을까? 동수는 시끄러운 주변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추운 날씨와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그의 몸과 얼굴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쉬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자리에서 불과 십 여 미터 떨어진 곳에 한 소녀와 노숙자 두 어명이 서 있었고, 그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이 문디 가시나가 디질라꼬 환장을 했나? 감히 내 지갑을 훔쳐?" 아까 동수에게 먹물이라고 놀렸던 노숙자가 소녀의 머리 체를 잡은 채 말했다. "이거 놓고 말해요!" 소녀는 노숙자의 팔을 거둬내며 말했다. 순간, 동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소녀의 얼굴이 마치, 자신의 딸 소연이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허둥지둥 그들에게 다가간 동수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원래 눈이 나빴던 그는 안경을 잃어버렸지만 돈이 없어 다시 맞추지 못했다.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본 그는 자신의 딸이 아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와 노숙자 사이에 언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노숙자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소녀에게 자신과 하룻밤 자자는 제안을 했다. 발걸음을 옮기던 동수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그들에게 돌아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 김형. 이 아이가 잘못했어도 어른이 어린 아이랑 잔다는 건 세상 도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이, 먹물! 니는 빠지라! 괜히 그라다 한 데 맞는다!" 노숙자는 소녀의 팔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 동수는 두 팔을 벌려 그를 막으며 말했다. "김형, 제가 대신 사과할 테니 이 아이는 보내 주세요, 네?" 동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숙자의 주먹이 동수의 얼굴을 후려쳤고, 바닥에 쓰러진 동수 코에선 코피가 흘렀다. "아저씨, 괜찮아요?" 소녀는 무릎을 꿇고 동수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숙자에게 "아니, 사람은 왜 때리고 그래요? 내가 하루 밤 같이 자 준다고 했잖아요?"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자 "아니, 이년 놈들이……"라는 노숙자의 말과 동시에 소녀는 노숙자의 낭심을 냅다 발로 걷어찼다. '억!'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노숙자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소녀는 동수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저씨, 빨리 뛰어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란 표정을 짓던 동수는 "어, 그, 그래……" 하고는 허둥지둥 소녀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4. 얼마나 뛰었을까? 바깥 공기는 차가웠지만 동수와 소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거친 숨소리와 뿌연 입김을 내뱉으며 뛰던 소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걸 확인한 그녀는 동수에게 말했다. "아, 아저씨! 이, 이제 그만 뛰어도 되겠어요!" 동수는 숨이 차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땅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만 내 쉬었다. 잠시 후, 둘은 시장 골목에 위치한 24시간 해장국 집에 들어가 앉았다. "난 돈이 없는데……" 동수가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살게요." 그렇게 둘은 이른 새벽 해장국으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참, 아저씨 소주 드실래요?" 소녀가 말했다. "아니, 난 술 못 마셔." "그래요? 그나저나, 아저씨 배 많이 고프셨나 보네요?" 동수의 뚝배기가 거의 빈 것을 발견한 소녀는 자신의 음식을 동수 그릇에 덜어주며 말을 이었다. "참, 그건 아셔야 되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밥 사준 사람은 아저씨가 처음이라는 거! 어서 드세요? 식겠어요." "어? 그, 그래……" 동수는 수저로 음식을 뜨다 말고 잠시 그녀를 쳐다봤다.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믿었던 친구에게 큰 돈을 빌려주고도 밥 한끼 못 얻어먹는 자신에게 처음 본 어린 소녀가 밥을 사준 게 고마웠고, 그래야만 하는 현실이 미안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간의 따스한 정과 배려에 동수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아저씨, 저한테 반했어요?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 아니 그, 그냥……" 동수는 창피한 듯 허둥지둥 밥을 먹기 시작했다. 둘이 식사를 마치고 해장국 집을 나서자 빗자루 질을 하는 환경미화원,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돌리는 젊은이 등 고요했던 길가에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아저씨는 우유랑 요구르트 중에서 뭘 더 좋아해요?" 소녀가 말했다. "난 우유가 더 좋은데……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밥 먹었으니까? 디저트 먹어야죠." 그녀는 동수의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는 거니?" "가보면 알아요." 잠시 후, 둘은 인근 아파트 내에 있는 놀이터에 도착했다. "아저씬 여기 잠깐만 앉아 계세요."라고 말한 소녀는 금세 사라졌다. 동수는 궁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벤치에 앉았고, 이내 소녀는 우유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드세요." 소녀가 동수에게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 "너, 설마? 이 우유 훔친 건 아니지?" "훔친 건 아니고 잠시 빌려온 거에요." "뭐? 그게 그거지. 너 자꾸 이렇게 남에 물건에 손 되면 안돼!" "기러기는 암컷이 알을 낳아 품는 동안 수컷이 주위를 떠나지 않고 지켜준대요, 그리고 앞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는 어미의 보호를 받다가 다 크면 둥지를 떠난대요. 한낱 기러기도 그런데 사람인 저는 부모님 얼굴도 모르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아빠, 엄마라는 소리를 못해봤어요" 그러자 소녀는 손 가락으로 '쉬!' 하는 동작을 하고는 점퍼 속에서 작은 수첩과 볼펜을 꺼내 뭔가 적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니?" 동수는 궁금했다. 소녀는 오늘 빌려온 우유 개수와 그 우유를 가져온 집 주소를 적는다고 했다. 아울러, 그녀는 지금은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남의 걸 빌리지만 언젠가 능력이 되면 다 갚아주려고 매번 남의 걸 빌릴 때마다 수첩에 적어 놓는다고 했다. "아저씨, 진짜 나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소녀는 수첩을 접어 점퍼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글쎄……" "진짜 나쁜 사람은요, 충분히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고 남의 걸 탐하는 사람들이에 요. 전두환 전 대통령 같은 정치인들, 돈이 많은데도 일부러 세금도 안 내는 부자들, 그리고 우리처럼 어린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업주들이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참, 아저씬 이름이 뭐에요? 전 아라에요. 고아라! " "아라? 이름이 참 예쁘구나! 나는 동수야, 한동수." 우연히 만난 둘은 그렇게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올해 17살인 아라는 생후 6개월 만에 생부에 의해 보육원에 맡겨진 후, 줄곧 그곳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러다 2년 전 그녀가 15살 되던 해에 그곳 원장이자 목사인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가출, 지금껏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생부에게 버림 받은 그녀는 늘 부모가 그리웠고, 따듯한 사람의 정이 그리워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고 다가섰지만,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어른들이 원한 건 그녀의 몸뿐이었다고 했다. 그녀를 위해 무조건 도와주건 동수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동수에게 밥을 사주었다고 했다. "그랬었구나……" 동수는 측은한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소녀는 "이제 아저씨 이야기 좀 해주세요?"라고 물었다. "글쎄?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던 동수는 처음 본 소녀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는 게 문득,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녀로 인해 오랜만에 느껴본 인간의 따듯한 정이 고마워 과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유복한 중산층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난 동수는 부모님 말에 순종하며 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선을 봐 결혼했다. 성실했던 그는 직장에서도 인정받으며 동기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그러는 사이 딸 소연이가 태어났고 동수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IMF 사태로 은행권 직원들이 추풍낙엽처럼 감원될 때도 그는 살아남았고, 오히려 40대 초반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지점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영어 광풍 때문에 그의 아내는 딸 소연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나겠다고 했다. 그는 가족의 참 뜻을 언급하며 반대했지만 아내를 이길 수 없었다. 1년만 다녀오겠다던 아내의 약속은 2년이 되어도 지켜지지 않았다. 동수는 날마다 불 꺼진 집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다. 혼자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매일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선 그에게 이따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는 아내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가끔은 그를 향해 반갑게 달려드는 딸 소연이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어깨는 축 늘어졌고 무거운 한 숨만 나올 뿐이었다. 꿈에도 원치 않던 이산가족이 된 그는 먹는 것 또한 부실해 눈에 띄게 야위어 갔고, 회사에서도 업무 실수를 하는 등 갈수록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이렇게 말랐구나?" 동수의 이야기를 듣던 아라가 말했다. "그렇지? 내가 조금 말랐지?" "아니요, 아주 많이 말랐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녀는 동수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때였다. 아파트 경비원과 한 아주머니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경비 아저씨, 내가 이런 사람들 우리 아파트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아파트값 떨어지면 경비 아저씨가 책임질 거에요?"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동수와 아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경비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 부녀회장님. 제가 순찰을 열심히 도는데도 가끔, 아주 가끔 이런 일이 생기네요."라고 하더니 동수와 아라에게 빨리 그곳을 떠나라고 했다. 5.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일이 또 있을까? 동수와 아라는 매번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서인지 아파트에서 쫓겨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걸었다.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었고 길가에는 사람도 차도 많았다. 전날 눈이 많이 와서인지 날씨는 비교적 포근했다. "아저씨, 그거 아세요?" 오랜 침묵을 깨고 아라가 말했다. "뭐?" "한국 아줌마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유별난지요?" "글쎄……" "어렸을 때 저랑 같이 보육원에 살다가 아주 부유한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정아라는 친구가 있어요." 아라는 그 친구와 보육원에서 가출하기 전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했다. 정아는 미국 내에서 손 꼽히는 부자동네에 살았는데 그곳에 사는 한국 아줌마들이 가끔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 미국인 이웃들이 뭐라고 하면 자신들의 잘못은 모른 채 무조건 인종차별이라며 고소하겠다고 방방 뛰었다고 했다. "아저씨, 방금 우리가 쫓겨난 그 아파트에 동남아 근로자나 중국동포가 이사 온다 고 하면 그곳에 사는 아줌마들은 아파트 값 떨어진다며 극구 반대하겠죠?"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동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전 어렸을 때 밤중에 화장실 가는 게 제일 무서웠거든요. 그런데 살아보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어른인 것 같아요. 욕심 많고 이기적인 어른들이요!" 동수는 아라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역시 같은 어른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저씨, 우리 짬뽕 먹으러 가요! 전 오늘처럼 기분이 꿀꿀한 날에는 얼큰한 게 땡기거든요." 잠시 후, 아라는 동수를 데리고 인근 대로변에 위치한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동수는 중국집이 아닌 공중전화 부스로 온 게 이상했지만 돈도 없고 배도 고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길 건너편에 있는 중국집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만리장성이죠? 여기 길 건너 편 빌딩 3층에 있는 올림픽 당구장인데요. 짬뽕 두 그릇하고 탕수육 하나만 갖다 주세요. 빨리요!" 동수가 궁금한 듯 부스 밖으로 목을 내밀고 빌딩을 올려보자 그곳에는 정말 올림픽 당구장이란 간판이 걸려있었다. "아저씨 가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라가 말했다. 동수는 궁금했지만 고개만 갸우뚱거리며 그녀를 따라갔다. 이윽고 둘은 당구장이 있는 빌딩 2층 계단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한 층 더 올라가서 저를 보고 있다가 제가 머리를 긁으면 큰 소리로 '너 오늘 죽었어!'라고 소리치세요. 알겠죠?" "그, 그래……" 동수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여전히 궁금했지만 그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동수가 3층으로 올라가 아래를 쳐다보고 있은 지 십 여분쯤 지났을까?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철 가방을 들고 올라오는 배달원의 모습이 보였 다. 그가 2층에 도착하자 아라가 그를 막아서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지금 올림픽 당구장으로 배달 가는 거죠?" "응. 그런데 왜?" "음식 여기다 놓고 빨리 도망가세요. 이거 이 동네 조폭 아저씨들이 시킨 건데요. 음식 늦게 온다고 아저씨 오면 버릇을 고치겠다며 지금 사시미 칼 들고 벼르고 있어요!"라고 말한 아라는 약속대로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그러자 동수는 그녀가 시킨 대로 '너 오늘 죽었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배달원은 얼굴색이 창백해 지더니 철 가방 속에 음식을 잽싸게 내려놓고는 올라온 계단을 한 번에 두세 칸씩 뛰어 도망갔다. 잠시 후 둘은 빌딩 옥상 한 쪽에 앉아 짬뽕과 탕수육을 먹기 시작했다. "넌 정말 머리가 좋구나!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했니?" 동수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대답 대신 "아저씨,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 먹어본 적 있어요?"라 는 질문을 던지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전 있어요. 보육원에서 나와 갈 데도 없고 돈도 없는데 배가 너무 고픈 거에요.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쓰레기 통에 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식중독에 걸려 진짜로 죽을 뻔했어요. 돈이 없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을 순 없잖아요.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살아남다니?"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있는 부모가 자신에게는 없다고 했다. 그녀는 좋은 집도, 좋은 옷도 원치 않는다고 했다. 단지, 부모를 만나 가족이란 울타리 속에서 단 하루만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했다. "아저씨, 전 기러기 보다 못한 사람이에요!" "기러기? 그게 무슨 말이니?" "기러기는 암컷이 알을 낳아 품는 동안 수컷이 주위를 떠나지 않고 지켜준대요. 그리고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는 어미의 보호를 받다가 다 크면 둥지를 떠난대요. 한낱 기러기도 그런데 사람인 저는 부모님 얼굴도 모르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아빠, 엄마라는 소리를 못해봤어요. 남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겹게 부를 수 있는 그 흔한 아빠, 엄마라는 말을요……" 아라의 맑은 눈가가 촉촉해 졌다. 그러자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 다. "저는 엄마 아빠 만날 때까지 절대로 울지 않을 거에요! 엄마 아빠 만나서 우는 건 행복해서 우는 거라 괜찮지만 지금 울면 제가 너무 초라하고 불쌍하잖아요!" 그녀는 소리 내지 않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봐서 억지로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동수의 눈도 촉촉해졌다. 동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라 옆으로 가 그녀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여전히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전보다 더 자주 들썩였다. 동수는 미안했다. 그는 이제까지 내 새끼만 안전하고 내 새끼만 잘 먹고 잘 크면 다 인줄 알았다. 결국, 아라도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고, 내 새끼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가 안녕하고 안전한 사회가 되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내 새끼도 안녕하고 더 안전할 수 있는 건데 지금껏 그걸 몰랐던 게 미안했다. 그녀는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지켜주어야 할 또 다른 우리였다는 것을 동수는 오늘에야 깨달았다! 그날 밤, 둘은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여기는 왜?" 동수가 물었다. "가끔 잘 때 없으면 이곳에 와요. 화장실에서 씻을 수도 있고 보호자인 척 앉아 있으면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지하에 있는 영안실에 가면 장례 음식도 얻어먹을 수 있어요." 동수는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어린 나이에 살아남기 위해 이 모든 과정을 몸소 터득하며 힘들게 살아왔을 그녀의 삶을 생각하니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쉬 멈출지 알았던 기침은 갈수록 심해졌다. "괜찮니?" 동수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오른 손을 들어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냈지만 기침은 계속됐다. 머지않아 기침은 멈추었지만 아라의 얼굴을 발갛게 달아 있었다. "괜찮니? 병원에 온 김에 진찰 한번 받아볼래?" "아니, 괜찮아요. 날씨가 추워서 그럴 거에요." "정말 괜찮겠어?" 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후, 바깥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응급실 현관문이 열리면서 119 대원들이 침대를 밀고 들어왔다. 침대에는 젊은 청년이 온몸에 피를 흘린 채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죠?" 간호사가 말했다. "교통사고 환자인데 급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조용했던 응급실이 순간 급하게 돌아갔다. 졸린 눈을 비비며 당직 의사가 나타났고 간호사들도 이리 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자의 보호자로 보이는 가족들이 나타나 '제발 살려달라.'라며 병원 관계자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특히, 환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라는 "이게 제가 여기에